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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월간 눈오는소리(제32호) <톨스토이 '인생독본'_September> 주요내용
작성자 원종오 (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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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일 2024-03-01 17:0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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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36

< 20240202(금) >


 

진리에 가까운 사람일수록 타인의 잘못에 더 너그럽고,

진리에서 멀수록 반대의 모습을 보인다.

 

(9월 2일)

 

어떤 일에 너그럽다는 건, 

그 일이 잘못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그 잘못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말입니다. 

서로 분리되어 있지만 근원에서는 한 생명이라는 마음이 얼마나 깊은지가,

대하는 태도를 결정합니다. 

너그러울 수 있는 까닭은, 

우리 수준에서 느껴지는 선과 악에도 불구하고 

우주는 늘 조화와 균형을 잃지 않는다는 걸 가슴에 새기기 때문입니다.

 

< 20240205(월) >

 

 

“날마다 완전히 새롭게 태어나라.

새롭게, 또 새롭게, 몇 번이고 새롭게 태어나라.”

 

(9월 4일 중국 탕왕의 욕조에 새겨져 있는 말)

 

똑 같은 강을 두 번 건널 수 없습니다. 

‘강’도 ‘사람’도 계속 변하기 때문입니다. 

선입견과 고정관념이 안 좋은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과거의 죽은 생각으로 지금을 대하기 때문입니다. 

‘깨어있음’과 ‘내려놓음’이란, 

신비하거나 고귀한 그 어떤 상태가 아니라, 

그저 이치에 맞게 삶을 대하는 일일 뿐입니다.

 

< 20240207(수) >

 

 

진정한 벌은 죄인의 영혼 안에서 이루어지며,

그것은 삶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힘이 줄어드는 것이다.

 

(9월 5일)

 

맹자는 ‘호연지기’를 기르려면 의로움을 쌓아가는 ‘집의(集義)’ 과정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진실하지 못하면 그 마음이 수축되고, 진실하면 넓어집니다. 

이러한 인과관계는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우주의 법칙입니다. 

결과를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으나, 우리는 원인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즉 법칙에 따라 결과를 지을 수 있는 역량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 20240209(금) >

 

 

삶을 이해하지 못하면

죽음이 두렵지 않을 수 없다.

 

(9월 7일)

 

동전의 앞면과 뒷면처럼 삶과 죽음은 한 몸이라, 

어두운 밤을 모르면 밝은 낮을 알 수 없듯, 

어느 하나만 떼어서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또한 관찰대상과 관찰자가 한 몸이라, 

반드시 스스로 살아보아야 합니다. 

어렵다고 회피하면 계속 두려움을 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일이 모든 중독에서 벗어나는 단초가 되고 

삶의 질을 높이는 유일한 길입니다.

 

< 20240212(월) >

 

 

지식은 위대한 사람을 겸손하게 하고,

보통 사람을 놀라게 하며,

보잘것없는 사람을 우쭐거리게 한다.

 

(9월 9일)

 

지식 뿐만 아니라 어떤 똑같은 사건이나 사람을 대할 때도, 

사람마다 그것을 대하는 모습은 다릅니다. 

이러한 사실은 일에 대한 반응은, 

그 일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대하는 사람에게 있다는 통찰을 줍니다. 

이것이 세상이 바뀌기를 원한다면, 

자기 자신을 먼저 바꿔야 하는 까닭이며, 

세상이 잘 바뀌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 20240214(수) >

 

 

욕망은 이겼을 때도

양심의 조용하고 깊고 위엄 있는 목소리에

겁을 먹는다.

 

(9월 10일)

 

어느 누구도 근원과 단절된 적이 없습니다. 

개체성이 있어서 근원과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여도, 

근원과 한 생명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양심이란 근원이 지니고 있는 한 생명의 균형과 조화의 감각입니다. 

개인이 전체의 균형과 조화를 훼손하는 욕망을 이루어도, 

곧 균형 회복 과정을 거치게 되며, 

우리는 그 느낌을 피할 수 없습니다.

 

< 20240216(금) >

 

 

구원은 특정한 종교에 대한 믿음이나 의식

또는 성사(聖事)가 아니라

자기 삶의 의미를 명확하게 깨닫는 데 있다.

 

(9월 11일)

 

구원이란 삶의 목적과 방향을 자명하게 알게 되는 일이고, 

구원에 이르려면 반드시 방황이라는 사막을 성실하고 진실되게 건너야 합니다. 

‘자기가 자기를 알게 되는 것’이 구원의 시작이고, 

밖에서 찾던 구원을 자기 내면에서 구하게 될 때, 

‘마음의 원리’를 이해하게 되고 구원의 빛이 들기 시작합니다.

 

< 20240219(월) >

 

 

지혜로운 자는 모든 것을 자기에게서 찾고

어리석은 자는 모든 것을 남에게서 찾는다.

 

(9월 13일 공자)

 

어떤 일의 원인과 해결책을 남에게서 찾는 건 남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태도’이고, 

자기에게서 찾는 건 나를 변화시키겠다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는, 

마음이 생각으로 ‘나’도 만들고 ‘남’도 만든다는 겁니다. 

나와 남을 모두 내 마음의 대상으로 볼 수 있을 때, 점차 지혜를 쌓아가게 됩니다.

 

< 20240221(수) >

 

 

어떤 지배자나 지주가

토지에 대한 어떤 특권을 샀거나 물려받았다고 해서

그 토지에 대한 도덕적 권리까지 갖는 것은 아니다.

 

(9월 17일)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과 재물은 반드시 목적에 맞게 사용될 때만이 

자신과 세상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오게 됩니다. 

자신에게 잠시 맡겨진 것을, 

그것을 맡긴 하늘의 뜻에 맞게 활용할 때만이 가치를 발휘하게 됩니다. 

이를 위해선 먼저, 

자신과 하늘이 무엇인지 그리고 자신과 하늘은 어떤 관계인지 이해해야 합니다.

 

< 20240223(금) >

 

 

나쁜 일이나 불행을 부르는 일은 하기 쉽다.

우리에게 선이자 행복이 되는 일은

고생과 노력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9월 20일 법구경)

 

우주의 방향은 ‘성장’이고, 우리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이 길을 받아들이는 소수와 아직 저항하는 다수가 있습니다. 

성장의 핵심은 의식의 성장이고, 

‘분리의식’에서 전체를 한 생명으로 보는 ‘전체의식’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나쁜 일’이란 분리의식에서 행하는 일이고, 

그것이 쉬운 건, 아직 분리의식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 20240226(월) >

 

 

죽음에 대한 공포는

삶의 아주 작은 일부를

삶 자체로 생각하는 잘못된 관념에서 비롯된다.

 

(9월 22일)

 

죽음의 ‘극복’은, 죽음에 대한 ‘생각’을 바로 잡는 일일 뿐, 

거창하고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 

생각을 바로 잡는 과정은 죽음을 ‘이해’하는 일입니다. 

어려운 논리나 복잡한 공식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깨어나서 잠드는 ‘하루’를 돌아보는 일입니다. 

한 방울 물이 물의 모든 속성을 지니듯, 

하루는 생의 모든 가능성을 지녔습니다. 

하루하루가 참으로 소중해집니다.

 

< 20240228(수) >

 

 

선한 사람은 남에게서 악을 찾지 못하고

악한 사람은 남에게서 선을 찾지 못한다.

 

(9월 27일)

 

이 말이 이해 되지 않는 까닭은, 아직 온전히 선한 사람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떨어져서 보면 멋진 단풍잎도 가까이서 보면 소멸과 탄생이 뒤엉켜 있음을 알게 됩니다. 

낮은 곳에서 보면 선과 악이 분명히 있지만, 

높은 곳에서 보면 모든 것이 법칙 안에서 질서 있게 운행됩니다. 

시선을 높은 곳으로 옮기는 일은, 

자신을 포함한 모든 존재를 대상으로 바라보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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